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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파산의 대학자 우계 성혼
작성자 관리자 [2024-06-13 14:2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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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의 대학자, 우계 성혼

 

- 걱정은 부족한 곳에 있지 않고 많은 곳에 있다

 

경기도 문화관광해설사 강근숙

 

   할미꽃 피는 계절이면 마음이 먼저 달려가는 곳이 있다. 내 고향 파주 향양리 들머리에 자리한 우계 성혼(1535~1598)선생 묘역이다. 아무리 바빠도 3월이면 소령원으로 노루귀 보러 가고, 우계 묘역 할미꽃 보러 가는 것이 나만의 봄 마중이다. 우수 경칩이 지났어도 바람이 날을 세워 할미꽃이 피었을까 싶지가 않다. 묘역 관리를 도맡아 하는 성낙운 이사께 할미꽃 피면 기별을 달라고 하였더니, 며칠 후 연락이 왔다. 마침 아들 며느리가 와 있던 참이라 지체 않고 달려갔다.

금촌에서 문산가는 중간쯤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향양리 작은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조선 시대 파주목 관아가 동남부지역 화물을 운반하던 포구가 있던 곳이라 서작포라 부르는 동네 어귀에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과 지하대장군地下大將軍, 장승 한 쌍이 수호신으로 마을을 지킨다. 몇 발자국 옮기면 동생 내외가 가꾼 푸성귀와 산나물을 뜯어 반찬을 만드는 맛집 은빛마을이 있고, 바로 뒤편이 우계 성혼묘역이다.

 

   파주읍 향양리는 안능안, 밖능안, 발이골, 생말, 네 개의 마을이 있다. 우계 묘 안쪽은 안능안, 바깥쪽은 밖능안, 발룡산 골짜기에서 용이 꿈틀대며 일어났다 하여 발이골, 골짜기에 족제비가 들끓어 생말이라 하였다. 묘역 아래에는 230년 전만 해도 곡선이 아름다운 논과 밭이 있었다. 어느 날부터 땅을 메우고 건물이 하나둘 들어서더니, 마을 하나가 더 생겼다. 일명 우계마을에는 어린이집, 상가, 공장이 생기고 201111월에 우계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밖능안에서 우리 동네 안능안까지 들어가는 흙길은 비가 오면 택시도 가기를 거부했는데, 2차선 도로가 깔리고 고래논이 있던 자리에는 빌라와 거대한 공장이 들어서 고향의 정취는 사라진 지 오래다.

 

우계 기념관 담장은 자연석을 둘렀고, 주위에는 학자수를 심어 선비정신을 나타냈다. 기념관 안에는 선생의 학문적 연원과 우계의 학파, 나라 사랑 정신과 후학양성을 주제로 한 상세한 자료들을 전시하였다. 성혼의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 또는 묵암黙庵,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아버지는 청송 성수침聽松 成守琛이고, 어머니는 파평윤씨 윤사원의 딸이다.

 

   사당 앞에서 성이사님이 우릴 맞는다. ‘할미꽃이 피었다는 말에 묘역으로 먼저 올라갔다. 예전에 지천이던 할미꽃이 환경 오염 탓인지 그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봉분 위 고개 숙인 할미꽃이 반갑다.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며 꽃망울을 카메라에 담는다. 메마른 땅속 그 어디에 저리 붉은 꽃잎을 숨겨 두었을까. 청송 선생 병환 중에 아들 우계는 밤낮없이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위독한 때에 이르러서 두 번이나 허벅지 살을 베내어 약을 해 드렸다 한다. 돌아가신 후 삼 년을 조석으로 분향재배하며 수없이 오르내렸을 묘역, 죽어서도 부모님 곁에 묻어달라던 지극한 효심은 봄이면 붉은 꽃으로 피어난다.

 

   우계 묘도 율곡 묘역처럼 역장이다. 맨 아래는 우계의 9대손이고, 가운데는 부모님 청송 성수침과 파평윤씨 쌍분이 자리한다. 올 때마다 살펴보는 봉분 사이에 세운 표석은, 글자를 앞뒤로 새긴 것이 특이하다. 앞면에 청송성선생지묘聽松成先生之墓 증정부인윤씨부贈貞夫人尹氏祔새긴 글씨가 또렷한데, 후면은 시커멓게 변색 되어 어느 부분은 전혀 알아볼 수가 없다.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들여다본다. ‘청송성선생휘수침지묘聽松成先生諱守琛之墓 증정부인파평윤씨부좌贈貞夫人坡平尹氏祔左청송 이름과 부인 윤씨의 본관이 첨부되었다. 성수침(1493~1564)은 만인의 존경을 받는 선생이었다. 지금은 선생이 흔하지만, 그 시대는 학덕이 뛰어나거나 본받을만한 훌륭한 인물이라야 선생이라 불렀다. 표석에 성선생지묘라고 새기면서 누가 성선생을 모르겠느냐했다는 말이 전한다.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여 제자를 길러 그의 문하에서 아들 성혼을 비롯한 많은 석학이 배출되었다. 저서로는 청송집이 있으며 명필로 이름이 높았으나, 남겨진 필적은 그리 많지가 않다.

 

   우계 성혼 묘(경기도 기념물 59) 부모님 묘 뒤에 있으며 단 분이다. 부인 고령신씨는 우계보다 18년이나 오래 살았는데, 풍수가가 그해 합장이 좋지 않다고 하여 적성면 장좌리에 장사지냈다. 우계는 죽기 전에 묘지문을 직접 지었고 묘비는 삼척비三尺碑로 하고 창녕성씨묘 다섯 글자만 써서 자손들이 알게 하라당부했다. 유언대로 묘갈 앞면에는 관직이나 시호 없이 창녕성씨휘혼지묘昌寧成氏諱渾之墓라 새겨있다. 뒷면 음기는 김집이 짓고 외손 윤순거가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 한 획 한 획이 얼마나 정교하고 아름다운지 눈을 뗄 수가 없다.

 

   선생의 묘역은 그 옛날 하굣길 동무들과 놀던 자리이다. 무덤 주인에 대해 자세히 몰랐어도, ‘아버지 병환이 위독해지자 허벅지 살을 베어 약을 해 드렸다는 얘기를 들으며 자랐기에, 막연히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옆이 바로 묘역이고, 구불구불 이어진 논둑을 밟고 가면 햇살 가득한 향양리 안능안 우리 마을이다. 열 살 남짓한 아이들은 집이 훤히 바라다뵈는 묘역에 책 보따리를 내던지고, 비석에서 아는 글자를 찾다가 부모님이 위독하면 허벅지를 베어 약을 해드릴 수 있느냐제법 심각한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서로의 허벅지를 꼬집으며 이렇게 아픈데 어떻게 살을 베어내느냐며 깔깔대던 자리, 오늘은 아들 며느리와 함께 풀꽃 같던 어린 시절을 더듬는다.

 

   묘역 아래 비각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다. 모양과 크기는 같으나 하나는 신도비이고, 또 하나는 묘갈이다. 신도비는 2품 이상 벼슬을 한 사람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기에 우계 성혼의 비는 신도비라 하고, 관직에 오르지 않은 청송 성수침 비석은 묘갈이라 일컫는다. 비각 안에 나란히 서 있는 두 개의 비석은 1648년 충주에서 채석한 돌로 우계 신도비는 다음 해에 건립되었고, 아버지 성수침 묘갈은 그로부터 2년 뒤 건립되었다. 우계 신도비는 송시열의 권유로 김상헌이 짓고, 자는 김상용, 김집이 글씨를 썼다관심이 쏠리는 것은 성수침 묘갈이다. 성이사께서 비각 문을 열어놓아 비석을 만져보고 글자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기대승이 지은 묘지墓誌와 이이가 적은 행장을 바탕으로 퇴계 이황(1502~1570)이 비문을 짓고 아울러 글씨까지 적었다. 파주에는 퇴계 선생이 지은 비문이 있기는 하나 (백비白碑를 하사받은 청백리 최흥원의 부친 최수진(1478~1547) 비문) 글씨까지 적는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퇴계 말년에 어렵게 받은 비문을 형편이 넉넉지 못해 몇십 년을 간직했다가, 퇴계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80년이 지난 1651년에야 비석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런데 글씨가 너무 가늘어 세월이 흐른 뒤 행여 닳아 없어질까 염려가 되었다. 아들 성혼이 큰 글자로 뒷면에 다시 새기려 하였는데, 난리를 만나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퇴계 선생이 적은 초본이 다행히 남아 있었기에, 우계의 뜻을 이어 선비들은 마음을 모았다. 우계의 문인 조익이 글을 짓고, 자는 김상용 유필을 집자하였다. 외손 윤순거가 쓴 글씨는 굵어서 알아보기에 편했다, 한참을 서서 비문을 더듬어 읽으며, 4백여 년 전 대학자들을 만난 듯 가슴이 벅차다. 아무리 봐도 청송 성수침 묘갈은 보물이다. 당대 최고 성리학자들이 공을 들인 예술품임에도 문화재로 등재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성수침(1493~1564)과 그의 아우 성수종은 조광조 문인이다. 청송은 기묘사화가 일어나 스승 조광조와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이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 벼슬을 단념하고 인왕산 기슭에 청송聽松이란 당호를 내 걸고 두문불출하였다. 1544년 어머니를 모시고 처가가 있는 파평면 눌로리 소개울 옆으로 이거 하였는데, 그때 성혼의 나이 10살이었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던 성혼은 아버지와 백인걸 문하에서 공부하여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막힘이 없었다. 학식이 널리 알려지자 전국에서 배움을 청하러 오는 유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우계는 집 동편에 서실을 만들고 학생들이 지켜야 할 22가지 규칙인 서실의書室儀를 벽에 붙여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곳이 바로 우계 학통의 산실로, 파산서원에서 백여 미터 가면 牛溪書室이라 쓴 표석이 세워져 있다.

 

   우계의 할아버지 사숙공 성세순은 크게 이름을 드날린 대는 가정교육에 그 근본을 두고 있다하였다. 성수침도 아들에게 항상 책을 읽고 실천하며 가업을 이어야 한다강조했다. 성혼은 가통은 물론 학문을 이어받아 훗날 그의 문하에서 우계학을 계승하여 수많은 유학자가 배출되었다. 벼슬을 마다하고 평생 제자를 기르는 성혼을 그 시대 지식인들은 우계牛溪라 불렀다. 우계 성혼은 약관의 나이에 같은 지역 출신인 율곡 이이栗谷 李珥와 구봉 송익필龜峯 宋翼弼, 송강 정철松江 鄭澈을 만나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고 평생지기가 되었다.

 

   세 분 선생의 편지글 삼현수간三賢手簡에는 개인과 개인의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조선 시대 몸소 성리학을 실천하고 학문을 하던 깨어있는 선비들의 주고받은 편지 속에는, 험난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의연하게 살아온 이야기가 그대로 묻어난다. 우계는 율곡과 송강보다 한 살 많고, 구봉보다 한 살 어렸지만, 서로를 존중하며 편지 보내는 인편에 차와 약재, 소소한 먹을거리를 주고받는다. ‘이 그리움이 어느 때나 그치겠느냐. 그리움이 간절하여 거의 새신랑과 같다표현하면서도 학문과 예법을 논할 때는 냉혹하게 지적하고 충고하며 깐깐한 선비 기질을 나타낸다. 특히 율곡 이이와는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이기理氣에 관하여 치열한 논쟁을 벌여 우율 논쟁즉 우계와 율곡의 논쟁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우계는 전란 중에 받은 대사헌이란 관직 역시 거절했으나 우참찬 자리는 도저히 사양할 수가 없었다. 폐질로 병약했음에도 국가 안위를 위해 선조 앞에 대책문을 올리고 목숨 건 간언을 하였다. 오로지 학문에만 힘쓰며 선비의 길을 간 우계 성혼은 정유재란이 끝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5986664세 일기로 파산 시냇가 오막살이에서 눈을 감는다. 제자들을 가르치던 우계서실 옆에 세워진 파산서원은 1650년 사액을 받는다. 훗날 흥선대원군은 1,700여 개나 되는 서원 중에 47개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철폐시켰는데, 파주의 자운서원(황해도 배천 문회서원에 율곡 이이를 배향하고 있기 때문), 용주서원, 신곡서원이 철페되고 파산서원만 살아남았다. 파산서원에는 파산학을 형성한 청송 성수침, 우계 성혼, 절효 성수종, 휴암 백인걸을 배향하고 매년 봄 음력 2월 중정일中丁日에 춘향사를 봉향한다.

 

   우계의 제자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목숨을 걸고 나가 싸웠다. 우계의 문인 가운데는 율곡 문하에서 수학한 문인들도 상당수이다. 의병대장 조헌은 율곡을 존경하여 호를 후율後栗이라 하였으며, 금산전투에서 7백여 명의 의병들과 함께 적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변이중은 의병을 모집하고 화차를 제조하였고, 충장공 김덕령 장군은 의병 5천을 모아 국난을 극복하는데 맹활약을 하였다. 안방준 의병장은 우계의 아들 문준의 사돈으로 의병을 일으켜 싸웠으며, 김상용 김상헌 형제 중 형은, 병자호란 때 강화성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하였고, 동생은 대사헌, 대사간, 6조 판서를 지냈다. 왜군에게 끌려간 의병장 강항은 일본에 성리학을 전파했으며, 팔송 윤황은 성혼의 사위로 대사성, 대사간을 지냈고, 그의 손자 명재 윤증은 기호학맥을 잇는 호서학파의 큰 맥을 형성했다. 그 외에도 김집, 이항복, 이정구, 김육, 조위한, 오윤겸, 윤전, 이 귀, 최기남, 신민일, 황신, 정엽 등등 2백여 명의 뛰어난 제자들은 학문을 닦아 선비의 모범이 되었다.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는 1682년 성균관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두 분의 제자인 조헌과 김집도 문묘에 이름을 올렸다.

 

   창녕성씨昌寧成氏하면 조선의 충신 성삼문이 떠오른다. 창녕성씨 시조의 현손 여완은 고려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석린, 석용, 석인 세 아들을 두었는데, 학문과 문장이 막힘 없어 집안이 번창했다. 단종 복위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사육신 성삼문은 석용의 후손이고, 성혼은 석인의 후손이다. 파주에는 창녕성씨 유적이 곳곳에 자리한다. 파평면 두포리에는 생육신 성담수 묘단이 있고, 법원읍 금곡리 관모봉 아래는 성삼문의 조부 성달생 묘가 있으며, 성삼문이 어릴 때 할아버지 옆에서 공부하며 붓을 빤 물이 개울을 검게 물들여 계묵溪墨이라 부르는 골짜기가 있다. 파주읍 향양리 우리 동네는 창녕성씨 선산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성혼의 조부 대사헌 성세순과 손자 성직 묘는 성수침과 성혼 묘 맞은편에 있으며, 성수종과 그이 형 성수근 묘는 안능안 왼쪽 산자락에 자리한다. 열두 집이 전체인 작은 마을에 창녕성씨가 일곱 집이나 되었고, 지금도 위토 전답이 많은 것을 보면 오래전부터 향양리에 터를 잡고 선산을 지키며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현수간三賢手簡우계의 편지글에서 온 집안이 향양向陽으로 옮겼다’ ‘향양에서 한번 만나자’ ‘향양에 오래 머물 것 같다는 구절과 구봉이 율곡에게 보낸 편지에 일전 호원浩原(우계의 자) 향양에서 만났다는 내용을 보면 우계 선생이 선산 언저리에서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나는 창녕성씨 선산에서 산토끼를 쫓아다니며 뛰어놀았다. 해설사가 되어 역사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여기 누워계신 분들은 어진 선비요 하늘이 내린 효자였다. 우계 선생은 초가삼간에 살면서도 걱정은 부족한 곳에 있지 않고 많은 곳에 있다하였다. 나이 들어도 배움이 즐겁고 가난해도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마음을 다지는 것은, 선생의 맑은 자취와 숨결을 느끼며 자라서인지 모른다.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틀림없이 그분의 문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할미꽃 수놓은 묘역을 천천히 내려왔다.

 

출처 : 길벗 20235월호 역사문화탐방 5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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